Author: jiwonkwak

  • 200년 걸릴 언어를 50년 만에 만든 집념의 언어 이야기

    200년 걸릴 언어를 50년 만에 만든 집념의 언어 이야기

    제가 전공하지도 않은 네덜란드어 책을 두 권 번역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우연이 작용했습니다.

    첫 네덜란드어 역서

    사실 소수 언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탓에, 독일어 전공자로서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회피했던 언어 목록에 네덜란드어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신생어이자 네덜란드어의 크레올에 속하는 소수 중의 소수 언어 아프리칸스어를 할 줄 알았던 것이 번역의 매개가 됐습니다. (물론 독일어 전공을 했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긴 하지만요.)

    까다로운 언어 취향을 가진 제가 매력을 느낀 아프리칸스어는 오해도 많이 받는 언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프리칸스어의 역사를 훑어보며 몇 가지 오해를 풀고, 흥미로운 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눈 돌아갔던 남아공 중고서점

    기원과 특징

    아프리칸스어는 17세기 네덜란드어에서 출발한 언어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항해술을 익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만들던 시기, 아프리카 최남단에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법이 상당히 단순화되고 형태가 크게 변형됐습니다. 동사 변화가 거의 사라지고, 성(性) 구분이 없어지는 등 구조적으로 훨씬 가벼워졌죠. 이 과정을 크레올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안 그래도 복잡도 순으로 독일어 >>>> 네덜란드어였는데, 이제 그보다 한층 쉬운 아프리칸스어가 된 셈입니다.

    동사 변화가 없는 아프리칸스어 좀 보세요. 출처: https://zubindoshi.com/a-brief-history-of-languages-their-future/

    노예로 유입된 말레이·인도네시아 계열 언어, 그리고 현지 코이산어 등과 섞이면서 유럽 본토 네덜란드어와는 꽤 다른 특징도 생겼어요. 예를 들어 ‘바나나’는 대부분 언어에서 banana(🇬🇧), Banane(🇩🇪), banane(🇫🇷), banaan(🇳🇱), banana(🇮🇹), plátano(🇪🇸) 식으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프리칸스어로는 piesang입니다. 말레이어 pisang에서 왔어요. ‘satay’도 sosatie 같은 형태로 쓰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존 네덜란드어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언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려 해요. 점차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유럽인들, 즉 아프리카너(Afrikaner,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과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들은 유럽 본토로부터 점점 외면당했습니다. 당시엔 지금 같이 비행기도 없었고, 네덜란드 본국은 이미 쇠락한 상태라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형편이 아니었어요.

    조상이 유럽인이고 피부색이 백인이지만, 남아프리카 땅에 정착한 이들의 정체성은 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 살던 네이티브 아프리카인들을 쫓아낸 거 아니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생각보다 아프리카 종족들끼리도 치열하게 싸워 왔습니다. 다양한 그룹들이 이주해 온 역사라서 피부색 하나만으로 ‘주인’을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 당신의 외국어가 제자리걸음인 이유

    당신의 외국어가 제자리걸음인 이유

    운동장에 몸만 던져놓는다고 근육이 생기지 않듯, 책상 앞에 앉아만 있다고 언어가 늘지는 않는다.

    스쿼트를 할 때도 힙 힌지(Hip hinge)를 제대로 잡지 않고, 타겟 근육에 자극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저 ‘숫자 채우기’식으로 몸만 움직이다 오면 몇 달을 해도 근육은 늘지 않는다. 무릎만 상할 뿐이다.

    영어 공부, 혹은 외국어 공부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공부하는 ‘기분’만 내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세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1. 공부하는 ‘기분’이라는 함정

    일주일에 몇 번 영어 스터디에 나가거나 학원에 등록하는 것은 훌륭한 ‘시작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단지 시작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몸만 덜렁 와서는 절대 실력이 늘지 않는다. 지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 모르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기
    • 새로 알게 된 것을 기록하기
    • 집요하게 복습하기

    이 과정이 빠진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

    최근 유행하는 듀오링고 같은 앱의 맹점도 여기 있다. 게임화(Gamification) 전략은 훌륭하지만, 어느 순간 ‘연속 학습 일수’를 지키기 위해 뇌를 뺀 채 손가락만 움직이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남는 것 없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전형적인 코스다.

    2. ‘집요한 호기심’의 부재

    나는 외국어로 된 콘텐츠를 볼 때 병적으로 메모한다. 최근 즐겨보는 남아공 시리즈 Die Kantoor(The Office의 남아공 버전)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나는 스티브 카렐의 열혈 팬이지만, 단언컨대 남아공 버전이 10배는 더 재밌다.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소수 언어권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고퀄리티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당신의 외국어가 제자리걸음인 이유

    당장 블로그에 이 글을 쓰면서 기억나는 표현들은 아래와 같다.

    • Kruip jy weg? (Are you hiding? 너 숨어 있니?)
    • Bel my rêrig! (Call me really! 진짜 전화해!)
    • Kom haal my! (Come fetch me! 날 데려가세요!)

    현재는 일주일에 에피소드가 하나씩 나오는데, 조만간 주말을 비워 ‘Kantoor 마라톤’을 할 예정이다.

    어쨌든 나는 모르는 단어나 좋은 표현을 보면 메모해 놓고, 기억하기 위해 계속 찾아보고, 입에 붙을 때까지 혼잣말을 반복한다. 뉴욕 타임즈를 읽든, 프랑스어나 독일어 영상을 보든 주옥같은 표현은 수십 개씩 쏟아진다. 한창 공부할 때는 그 표현들을 받아 적고 복습하는 데 하루의 대부분을 썼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모르는 표현이 나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가거나,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 부끄러워서 덮어버린다.

    공부할 동기에 불을 지피는 연료는 호기심이어야 한다. 호기심이 없으면 집요함도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일찌감치 극복하는 것이 좋다.

    3. ‘기본’을 무시하는 태도

    주어와 동사 수 일치도 맞지 않는 엉망진창인 문장 구조에, 어디서 본 고급 어휘를 섞어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건 상대방에게 인지 부조화를 일으켜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할 뿐이다.

    사람들은 쉬운 문법을 우습게 본다. ‘내가 다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독해는 누구나 하겠지만, 직접 말을 뱉을 때 문장이 망가지는 이유는 그 문법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기본 동사 100개 정도를 인칭대명사 별로 올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 기본 전치사와 형용사의 정확한 쓰임새와 발음을 숙지했는가?
    • 기본 문법 오류를 스스로 찾고 검열할 수 있는가?

    이 단계를 넘어서야 어려운 단계로 갈 자격이 생긴다.

    영어는 동사 변화가 양반이다. 다른 언어에서 동사는 고통의 근원이며 정체성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겨우 영어의 동사 변화 정도에서 귀찮음을 느낀다면, 다른 언어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마치며

    스쿼트의 핵심이 근육의 자극을 느끼는 것이듯, 공부의 핵심은 뇌의 자극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공부는 ‘뇌를 뺀 행위’였는가, 아니면 ‘집요한 추적’이었는가?

    만약 후자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듀오링고를 끄고 기본 동사 변화표부터 다시 펼치길 권한다.

  • 남아공 때문에 심난한 이야기

    남아공 때문에 심난한 이야기

    나는 남아공을 좋아한다. 아프리카너(Afrikaner) 특유의 투박한 억양과, 불과 백 년 만에 아프리칸스어를 학문적 수준으로 격상시킨 그 광기 어린 의지력에 경외감을 느낀다. 육식에 진심인 성향과 은근히 보수적인 면모도 내 취향에 닿아 있다.

    한편으론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흑인 여성들의 지적 잠재력과 회복탄력성에서 이 나라의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먹방을 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남아공 흑인 여성의 먹방이다. 그녀의 성공이 다른 여학생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개별 존재의 반짝임과는 별개로, 이 국가의 시스템은 형용할 수 없는 괴사 상태에 놓여 있다. 내가 목격한 남아공은 인적 자원의 풍요와 구조적 파멸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강제된 평등: B-BBEE와 고용 쿼터제의 역설

    남아공에는 B-BBEE(Broad-Based Black Economic Empowerment)라 불리는 흑인 경제 육성법이 존재한다. 단순히 권장하는 수준이 아니다. 기업의 소유권, 경영진 구성, 심지어 공급망까지 흑인 비율에 따라 ‘점수(Scorecard)’를 매긴다. 점수가 낮으면 정부 사업 입찰은 물론, 민간 기업 간의 거래에서도 후순위로 밀려난다.

    2024년부터 강화된 고용 평등법(EEA)은 숙련직군에서 흑인 비율을 최대 90%까지 요구하며, 위반 시 매출의 10%를 벌금으로 부과한다. 의도는 선했으나 결과는 냉혹하다. 숙련된 기술자나 경영진이 인종 쿼터에 밀려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를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이 채우면서 국가 기간망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노답 사례 1: 힐브로우

    70-8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중심이었던 힐브로우(Hillbrow)는 이제 범죄와 오물의 상징이 되었다.

    아파르트하이트가 끝나고 부유한 사람들은 샌튼(Sandton)으로 넘어갔고, 힐브로우는 점점 황폐화되었다.

    갱단이 점거한 고층 빌딩에는 상하수도가 끊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변기를 사용한다. 지하실에 수백 명분의 인분이 쌓여가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말티즈 한 마리가 사용하는 배변 패드도 악취가 생기는데, 수백명 사람들에게서 나온 오물이 지하실 전체를 덮고 있는 사실은 말문이 막힌다.

    힐브로우 전과 후

    화려했던 근대 건축의 껍데기 속에서 도시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개노답 사례 2: 전기 국영화

    남아공에 있다보면 종종 전기가 끊기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Load Shedding이다. 그래서 태양열 발전기가 있는 집이 많다.

    이 전력난은 단순한 에너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효율적이었던 전력사 에스콤(Eskom)이 국영화 이후 부실 경영, 부정부패의 온상이되어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된 결과이다.

    이를 개혁하려던 전 CEO 안드레 드 루이터(André de Ruyter)는 커피에 청산가리 투척을 당해 결국 사임하고 잠깐 나라를 떠나야 했다.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지식인은 목숨을 걸고 개인 경호원에 의지하거나 망명을 택해야 하는 것이 남아공의 문법이다.

    실제 현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Snitches get stitches, and end up in ditches.” (밀고자는 꿰맬 상처를 입고, 결국 도랑에 처박힌다.)

    개노답 사례 3: 택시 조폭

    남아공의 택시 산업은 태생부터 비극적이다. 70~80년대 아파르트하이트 시절, 인종차별 정권은 흑인들을 일터에서 먼 변두리로 몰아넣고도 어떠한 이동 수단도 제공하지 않았다. 국가가 외면한 이 거대한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민간 미니버스 택시였다.

    초기엔 불법이었으나 생존을 위해 자생했던 이 산업은 1987년 규제 완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버스와 기차를 불태우고, 전문 킬러(Izinkabi)를 고용해 정적을 제거한다. 택시에서 총을 쏘고 유유히 사라지는 청부 살인 장면은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택시 기사들과 우버 기사들 간의 폭력 사태

    과거 흑인 인권을 위한 유일한 발이었던 조직이, 이제는 대낮에 정적을 제거하고 국가 인프라를 불태우는 ‘그림자 국가’가 된 것이다.

    개노답 4: 경호 업체도 연루된 농장 서리

    남아공 길거리에서 타조알 만한 아보카도 5개를 3천 원에 샀을 때, 나는 그것이 아프리카 대지의 축복인 줄로만 알았다. 순진한 오판이었다.

    수확까지 8년이 걸리는 아보카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가거나, 농장 보안 업체와 결탁해 조직적으로 훔친 장물이었다. 무지한 소비자가 누린 저렴한 가격의 배후에는 생산자의 절망이 깔려 있었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축복받은 남아공의 아보카도’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마트에서 사면 한국과 크게 다른 가격은 아니다.

    결론

    개개인을 보면 여전히 이 나라의 미래를 믿고 싶어진다. 어떻게 해야 이 비극이 멈출 수 있을지 혼자 머리를 싸매며 고민에 잠기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처럼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지으면 해결될까? 하지만 문제는 파편화된 시설이 아니라 붕괴된 공교육 시스템 그 자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백을 메운 사교육 시장은 기형적일 만큼 비대해졌다.)

    개인이 시스템 차원의 개혁을 시도하기엔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 부패를 척결하려 하면 지나가던 택시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거나, 아침 커피에 든 청산가리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정의감은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

    위와 같은 사례를 접할 때마다 짙은 무력감이 든다. 개노답 사례는 언급한 것 외에도 더 많다.

    시스템이 머리부터 부패한 이 곳에서, 축복 받은 자연과 자원이 구조적 어둠에 먹혀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몹시 괴롭다.

  • 자제력

    자제력

    최근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는 외적인 성취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인 ‘자제력(Discipline)’을 포함한다. 특히 기술이 즉각적인 보상을 설계하고 제공하는 시대일수록, 본능을 거스르고 보상을 지연시키는 능력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만은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중대한 사회적 문제였다. 풍족의 시대 속에서 우리의 미각은 설탕과 지방에 길들여졌다. 하지만 위고비(Wegovy) 같은 GLP-1 수용체 효능제의 등장으로 체중 관리는 이전보다 훨씬 쉬워지고 있다. ‘자기 수용(Body Positivity)’을 외치던 유명인들이 하나둘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간의 담론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물론 몸을 조형하는 일에는 여전히 고통이 따른다. 삼두근의 데피니션을 살리거나 유전적 한계를 넘어 중둔근을 키우는 과정은 고되다.

    하지만 기술은 이 지점마저 파고들고 있다. 미주와 남미에서 성행하는 브라질리언 엉덩이 리프트(BBL) 란 게 있다. 한국에서는 미감과 맞지 않아 비교적 드물지만, 신체의 굴곡을 극대화시켜주는 수술이다.

    저속노화에 수백만 달러를 쓰는 브라이언 존슨은 $5,700 수준의 EMS 장치로 30분 만에 복근 운동 20,000회의 효과를 낸다고 한다. (물론 그도 매우 엄격한 운동을 한다.)

    자제력

    이제 날씬해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앞으로도 점점 쉬워질 것이다.

    식욕 억제제, 근육 형성 기기, 신체 재구성 수술. 이제 ‘노력’이라는 지루한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

    인간은 운동을 안 하고 안 좋은 식습관을 유지하면 몸이 망가지고, 살이 찐다. 과거에는 이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본능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인내’의 영역이 점차 자본과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그런데 기술이 노력의 과정을 자동화한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위고비를 통해 식욕이 사라진 상태에서 나는 굶을 것인가, 술을 마실 것인가, 고단백 영양 밀도가 높은 식단을 선택할 것인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몸이 아프지 않아도, 당장 불편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기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그 자유가 방종과 구분되지 않으면 삶은 금방 붕괴한다. 신체 대사를 약물에 맡기고 근육 형성을 기기에 의존하더라도, 매일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고 식단을 결정하는 주체성은 결국 개인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은 여전히 저항이 적은 편안한 길을 찾는다. 몸은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게으르길 원하며, 입은 달고 기름진 것을 찾으며, 우리의 정신은 즉각적인 보상 반응을 좇는다. 기술이 우리를 본능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빈자리를 채울 ‘의식적인 선택’의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현시대에 자제력이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외부의 유혹 속에서도 정신적 명징함과 몰입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불편함’을 수용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제력은 동물적 본능을 이겨내는 인간다움의 핵심 요소이며, 이를 통해 쌓은 가치는 복리로 축적된다.


    머지않아 날씬함 그 자체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규율을 세우고 지켜내는 자제력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더욱 강력한 지적 신호가 될 것이다.

  • 타인의 신경계를 빌려 쓰는 무례함, ASAP

    타인의 신경계를 빌려 쓰는 무례함, ASAP

    대부분의 ASAP은 상대가 게으르다는 불신을 전제로, 인위적인 위급함을 동원해 결과물을 쥐어짜내는 비합리적인 방식이다.

    타인의 신경계를 빌려 쓰는 무례함, ASAP

    “ASAP” 요청을 받으면 내 중추신경은 즉각 과잉 각성 상태에 돌입한다. 나의 뇌는 ‘맥락도 모른 채 내일까지 넘겨야 하는 문서’와 ‘당장 출산을 앞둔,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는 강아지’의 위급함을 변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말을 반납해서라도 마감을 맞췄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며 기이한 패턴을 발견했다. ‘급하다’던 그 문서가 정작 요청자에 의해 열람된 건 열흘 뒤인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진짜 위급한 상황에서 함께 속도를 내는 경험은 팀워크를 강화한다. 그런데 ‘일단 급하다고 말해두는’ 무분별한 ASAP 요청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일단 상대가 느릴 것이라는 편견을 전제로, 타인의 에너지를 자기중심적으로 탈취하여 상황을 통제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런 부조리함이 지식 노동의 현장에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진 것일까?

    1. 파킨슨 법칙: 시간의 팽창이 만든 공격적 방어 기제

    최근 덴마크 학자들이 쓴 『가짜 노동』을 읽으며 이 실체 없는 귀신을 비로소 언어화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화이트칼라 직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바쁨’이 성과와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을 다룬 책이다.

    저자들은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을 인용한다. 업무는 그것을 위해 주어진 시간만큼 팽창한다는 법칙이다. 같은 일이라도 3일이 주어지면 3일을 쓰고, 10시간이 주어지면 10시간을 쓴다.

    타인의 신경계를 빌려 쓰는 무례함, ASAP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일을 늘어뜨려 ‘바빠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ASAP은 바로 이 ‘팽창하는 시간’에 대한 공격적인 방어 기제였던 것이다. 상대가 시간을 허비할 것이라는 가정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데이터로 쌓여온 결과다. 결국 ASAP은 개개인의 조급함 때문이라기보다, 이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내놓은 기형적인 부산물인 셈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바쁨’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2. 텅 빈 유능함: 바쁨이라는 이름의 알리바이

    이 책은 ‘바쁨’이 성과와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을 ‘텅 빈 유능함(Empty Competence)’이라 명명한다. 우리가 ASAP을 던지고 받는 행위는 종종 실제 업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나는 이만큼 긴박한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유능한 인재다”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실존적 알리바이가 아닐까?

    결국 ASAP이라는 요청은 타인의 신경계를 빌려 쓰는 무례함인 동시에, 조직 내에 ‘가짜 바쁨’을 전염시키는 촉매가 된다. 누군가 무리하게 ASAP을 던지면, 받은 사람은 이를 처리하기 위해 다른 유의미한 업무를 뒤로 미루거나, 정작 결과물이 방치되는 것을 보며 ‘의미 없는 속도전’에 냉소하게 된다. 실질적 의미 없이 ‘바쁨’의 외형만 제공하는, 소모적인 ‘가짜 노동’의 굴레다.

    3. 가짜 노동의 번아웃: ‘연기’가 소모하는 에너지

    꼭 마감 직전에 과제를 제출하는 친구들. 낮에 할 일을 굳이 밤에 하는 사람들. 1시간이면 끝날 일을 4시간 걸렸다고 말하던 사람들. 어떤 모양의 글머리 기호를 사용할지 미팅을 10분 넘게 이어지는 광경. 이 파편화된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 아득한 어지러움의 정체가 바로 ‘가짜 노동(Pseudo-work)’이었던 셈이다.

    가짜 노동이 우리를 번아웃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노동의 절대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아무 가치 없는 일을 가치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연기’의 에너지가 본질적인 노동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내가 과거에 느낀 공허함은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싶다는 직업적 본능이 시스템의 무의미함과 충돌하며 발생한 파열음이었다.

    4. 본능적 저항: 의미의 박탈에서 존엄을 회복하는 법

    저자들은 가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으로 ‘진짜 삶으로의 회귀’를 제안한다. 의미 없는 보고서를 붙들고 앉아 시간을 죽이는 대신, 차라리 일찍 퇴근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거나, 진정한 자기 계발에 몰입하라는 것이다. 조직이 요구하는 ‘바쁜 척’이라는 연기를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실질적 효능감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의미 없이 시간을 늘어뜨리는 행위는 단순한 지루함을 넘어 자괴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시스템이 요구하는 ‘바쁨을 위한 바쁨’에 매몰되는 대신, 남는 에너지를 조직과 동료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더하는 활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사내 영어 동호회를 운영하고 코딩 세션을 연 것은 고과 평가나 보상을 바란 일이 아니다.

    이는 저자들이 말하는 ‘공허한 유능함’에 대한 거부이자, 박탈된 ‘기여의 기쁨’을 스스로 복원하려는 주도적인 노력이다. 타성적인 관행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고, 내가 선택한 가치에 에너지를 쏟는 것. 이러한 정체성 지키기가 나의 직업적 존엄을 지탱해주고 있다.

    5. AI 시대의 노동: 스스로 만든 병에서 벗어나기

    파킨슨 법칙은 인간의 본성일까, 시스템의 결함일까. 기술의 발전은 여가를 약속했지만, 인류는 관료주의적 헛짓거리를 발명해 그 빈칸을 메웠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시간을 때우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만든 병’인 번아웃을 얻는다.

    AI가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도, 우리가 ‘바빠 보여야 산다’는 가짜 노동의 윤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유는 오지 않는다. 기술은 시간을 벌어주지만, 관료주의는 그 빈칸을 다시 ASAP과 무의미한 보고서로 채울 것이다.

    나의 시간만큼은 가짜 노동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에 온전히 쓰고 싶다. 한 회사에 소속된 정체성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타인에게 기여할 것인가. 이 고민만이 가짜 노동 사회의 공허함에서 나를 건져줄 유일한 밧줄이라 믿는다.

  • 남자를 위한 구조적 연애론

    남자를 위한 구조적 연애론

    남성 집단의 우정은 종종 상호 파괴적 결속을 ‘의리’라 부른다. 장염에 걸린 친구에게 불닭볶음면을 사다 주거나, 비위생적인 습관을 공유하며 서로를 비웃는 행위가 친밀함의 척도가 된다. 이러한 문화권 내에서 개인의 성장을 향한 진지한 피드백은 ‘진지충’이라는 멸칭 아래 거세된다.

    성인 남성이 자신의 결함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경로가 차단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부모와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고, 친구들은 서로를 방치하거나 하향 평준화한다. 결국 20대 후반을 넘어서는 순간,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외적 경쟁력에 대해 누구에게도 정직한 비평을 듣지 못하는 ‘피드백 진공 상태‘에 놓이게 된다. 구조적인 지지 시스템 없이 홀로 남겨진 남성은 ‘왜 나는 연애를 못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좌절과 자존감 하락을 반복할 뿐이다.

    인센티브와 장기적 자산의 혼동

    하루는 평상시 반바지와 슬리퍼를 고수하던 개발자가 긴바지를 입고 출근한 모습을 보고 “소개팅이 있냐고” 장난삼아 물어본 적이 있다. 이때 “맞다”고 답하는 것을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성애자 남성의 자기 관리는 극도로 효율 중심적이다. 즉각적인 인센티브, 즉 확정된 보상(소개팅, 데이트)이 존재할 때만 자원을 투입한다. 

    매력은 이벤트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층된 구조의 결과물이다. 소개팅 전날 구입한 셔츠는 옷장에 남겠지만, 6개월간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프레임과 피부 상태는 정체성에 귀속된다. 전자는 구매 가능한 소모품이고, 후자는 감가상각이 낮은 자산이다. 대다수 남성은 이 자산 형성에 투입되는 시간을 ‘비효율’로 간주하며 기꺼이 포기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피부 관리, 눈썹 정리, 체형에 맞는 핏까지 탐구한 남성들. 이는 자기 객관화가 선행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들은 잘 보일 상대의 유무와 상관없이 ‘디폴트 값’ 자체를 상위권으로 유지하며, 연애 시장에서 큰 부침을 겪지 않는다. 이들에게 관리는 이벤트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조건이라는 핑계: 유전자 잭팟과 그 외의 것들

    “잘생기고 키가 커야 한다”는 명제는 연애 시장의 절대 진리처럼 통용된다. 물론 유리한 조건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타고난 조건을 결핍의 원인으로 둘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피터 딩클리지(Peter Dinklage)는 132cm의 키로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내가 관찰한 경우만 하더라도, 키가 작거나 평범한 외모의 남성들이 자신의 다른 매력을 십분 발휘해 연애를 잘만 하고 다니는 사례는 수두룩하다. 당신의 주변만 둘러봐도 즉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특별하다’는 정당화는 본인에게만 손해다. 유전자 잭팟을 맞은 0.1%와 자신을 비교하며 노력을 거부하는 벽을 깨부수지 못하면 삶의 질은 정체된다. 키와 얼굴을 바꿀 수 없다면, 바꿀 수 있는 나머지 80%의 변수(체형, 청결도, 문해력, 경제적 기초)에 집중하는 것이 지적으로 정당한 태도다.

    이상형이라는 망상과 자기 객관화

    ‘눈이 높다’는 고백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기준이 높은 것은 남녀 불문 권장할 일이다.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의 기준과 현재 자신의 상태 사이의 격차를 정밀하게 측정하지 않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당신 상상 속의 완벽한 상대가 당신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일방적 기대다.

    자기 관리와 심리적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채 높은 기준만을 고수하는 것은, 마치 자본 없이 고수익 자산을 매입하려는 시장 교란 행위와 같다. 

    취향의 부재와 지루함의 구조

    ‘취미를 가지라’는 조언은 단지 이성을 만날 접점을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데이터 입력을 다양화하라는 구조적 명령이다. 즐거운 대화는 모든 관계의 시작이며, 유전자 잭팟 없이도 연애를 지속하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상대가 지루할 틈 없이 재치 있게 대화할 수 있다면 게임의 양상은 달라진다.

    대부분 대화의 지루함은 화술의 부족이 아니라 콘텐츠의 빈곤에서 기인한다. 선호하는 음악, 영화, 사진작가, 브랜드에 대한 주관이 전무한 상태에서 상대와의 교집합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입력값이 없으니 출력값은 언제나 본인의 커리어나 업무 상세 내용 같은 ‘안전하고 지루한’ 데이터로 수렴한다. 

    자신의 전공 분야나 박사 연구 주제를 초면에 1분 이상 늘어놓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정보 송출이다. 만약 이를 흥미롭게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인내심이나 지적 호기심이 경이로운 수준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셀(Incel) 현상: 자기 객관화 실패의 종착지

    자기 객관화 없이 이상형만 노래하다가 반복적인 거절을 당하면, 정신 건강은 오염되기 시작한다. 남성은 사회적 거절을 시스템의 문제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고립되기 쉽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인셀(Incel)의 극단적인 소외 현상은 상당 부분 이러한 ‘자기 객관화의 실패’에서 시작된다. ‘자산 형성의 게으름’을 ‘사회적 피해’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루함, 눈치 없음, 관리되지 않은 신체를 개선하는 대신 시스템을 비난하며 고립을 자처한다. 2014년 엘리엇 로저(Elliot Rodger) 사건이나 2020년대 영미권 및 한국에서 발생하는 혐오 범죄들의 기저에는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세상이 나를 거부한다”는 거대한 인지 부조리가 깔려 있다. 발전 없는 상태에서 누적된 거절감이 분노로 변질될 때, 개인은 연애 실패를 넘어 사회적 부적응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급행열차를 타게 된다.

    결론: 매력의 설계

    존 햄(Jon Hamm)이나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방출하는 중년 이후의 매력은 시간의 흐름이 준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상호작용과 관계의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시스템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한 결과물이다.

    당신이 상정하는 이상적인 파트너가 어떤 남자를 원하는지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해보라. 높은 기준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구조적 노력이 결여된 상태는 지질함이 아니라 지능의 문제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자만이 쟁취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이 높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산을 먼저 설계하라.

  • 협업의 공식에는 항상 ‘인간 변동성’ 상수를 넣어야 한다.

    협업의 공식에는 항상 ‘인간 변동성’ 상수를 넣어야 한다.

    협업의 공식에서 가장 흔하게 누락되는 값은 ‘인간’이라는 변동성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결된 설계라 해도, 실행의 단계에서 그 공식은 반드시 사람이라는 필터를 통과한다.

    학습의 속도, 집중의 밀도, 특정 유인에 반응하는 성향. 이 무궁무진한 차이와 천태만상의 변수들은 어느 조직에서든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상수다. 이를 계산에서 제외하는 순간, 설계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가설에 머문다.

    한때는 ‘나만 완벽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는 논리가 유효하다고 믿었다. 내가 빠르고 정확하게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전체의 속도 또한 비례하여 상승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이는 시스템 전체가 아닌 부분 최적화에 매몰된 시각이었다.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정교한 논리도 타인의 해석 체계를 통과하는 순간 그 궤적이 뒤틀리고, 한 부품이 뛰어나도 그것이 전체 공정의 속도를 보장하지 않는다. 개별 주체가 스스로의 완결성에만 몰입할 때,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결함은 ‘타인의 역량 부족’이라는 개인의 문제로 은폐된다. 시스템적 보완책(예: 가이드라인의 정교화, 확인 절차의 재설계)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상대의 무능’이라는 쉬운 결론에 안주하게 만든다.

    협업의 좌절은 많은 경우 시스템 설계 단계에서 ‘인간’의 변동성을 상수가 아닌 오차로 간주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역량의 척도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며, 시스템의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다. 개인의 자질을 심판하는 행위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구조적 개선의 기회를 포기하게 만든다.

    ‘저 사람은 왜 일머리가 없을까’라는 분노는 결국 관찰자 본인의 설계 역량이 타인의 변동성을 포용할 만큼 확장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의미의 실행력은 진공 상태에서의 속도가 아니라, 타인의 변동성과 정보의 비대칭성을 구조 안에 포함시킨 상태에서도 목표를 달성해내는 복원력이라고 할 수 있다.

    채용이 까다로운 이유 또한 단순히 ‘우수한 인재’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구조물 안에서 발생할 마찰계수를 예측하고,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변동폭을 가진 인물을 선별하는 고도의 리스크 관리 과정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타인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휜 소나무를 분재의 재료로 삼듯, 그 굴곡을 설계의 재료로 삼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직선적인 결과물만을 고집하는 이는 혼자 일할 때 가장 빠르겠지만,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이는 비틀린 재료들을 맞물려 견고한 아치를 만든다. 

    협업은 개인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무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상수를 포함하여 시스템의 복원력을 설계하는 구조적 엔지니어링의 영역이다.

  • AI가 보편화될수록, 글쓰기 실력의 격차는 더 잔인하게 벌어집니다.

    AI가 보편화될수록, 글쓰기 실력의 격차는 더 잔인하게 벌어집니다.

    저는 현업에서 타인의 글을 번역, 편집, 재작성하는 일을 오래 해왔습니다. 최근 AI를 활용한 글들을 마주하며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LLM(거대언어모델)은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어줄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러티브 구성 능력’과 ‘메타인지’까지는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AI를 활용해 글을 쓰면, 결과물은 필연적으로 ‘속 빈 강정’이 됩니다.

    1. 표면적 신호(Surface Signals)의 가치 하락

    과거에는 세련된 어휘와 전문 용어가 작문 실력의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AI가 몇 초 만에 휘황찬란한 비유와 유창한 표현을 생성해냅니다. 누구나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피상적인 작문 신호들은 급격히 가치를 잃었습니다.

    2. 내러티브라는 새로운 격차

    이제 진짜 실력은 ‘글의 흐름과 맥락을 설계하는 능력’에서 갈립니다. 사용자는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그릇만큼 AI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용자의 ‘내러티브 구성 능력’ 및 ‘메타인지’가 AI의 성능을 결정짓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난 주 흥미롭게 본 연쇄 살인마 제프리 다머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감상문을 쓴다고 해보겠습니다.

    • 일반적인 접근: “그는 잔혹했다, 정신 이상자였다”는 식의 단편적 감상 나열.
    • 설계된 내러티브: 재판의 핵심 쟁점인 ‘법적 정신 이상’의 정의를 화두로 잡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을 통해 법적 용어와 일상 용어의 괴리를 짚고, 미셸 푸코의 광기 담론을 빌려 사회적 맥락을 분석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예를 든 것이지만, 머릿속에 뼈대가 잡혀 있는 사람은 AI에게 던지는 프롬프트의 수준부터 다릅니다. 결과물의 진정성과 몰입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3. AI 시대의 편집자(Editor)가 되는 법

    AI가 뱉어내는 장식적 문장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내용을 어떻게 조합하고 무엇을 살릴지 결정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개념의 차이와 맥락을 읽어내는 비판적 사고 능력,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는 학제간 지식(Interdisciplinary Knowledge),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자각, 즉 메타인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문장력이 ‘공짜’가 된 AI 시대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량을 요구합니다. 도구에 의존하기 전에, 나만의 지식 지평을 넓히는 독서와 사고의 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입니다.

  • 끝까지 읽히는 글은 무엇이 다른가 — ‘글의 밀도’에 대하여

    끝까지 읽히는 글은 무엇이 다른가 — ‘글의 밀도’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 글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야 토큰을 쏟아내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지만, 오늘날의 글쓰기는 독자의 집중력이라는 희소 자원을 두고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라디오 드라마가 성행하던 시절, 사람들은 소리만으로도 등장인물의 미묘한 심리와 희로애락에 깊이 몰입했습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요. HD 화면 속에서 화려한 CG와 천재지변이 펼쳐져도, 현대인은 쉽게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자극의 역치는 높아졌고, 인지 자원은 희귀해졌습니다. 독자는 자신에게 효용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집요하게 붙잡는 편집자적 기준은 바로 ‘글의 밀도’입니다.헐렁한 문장들이 모여 있는 글은 밀도가 낮습니다. 시간을 들여 읽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글의 밀도를 높이는 과정을 종종 ‘스티브 잡스의 엘리베이터 해고’에 비유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직원에게 업무 내용과 기여도를 묻고, 답변이 설득력이 없으면 바로 해고했다는 일화처럼 말이죠.

    제가 글을 편집할 때 사용하는 판단 방식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첫째, 모든 단어는 문장 안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조사나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수식어부터 과감히 덜어냅니다.

    둘째, 모든 문장도 글 전체에서의 존재 가치를 치열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이 문장은 정보를 전달하는가, 논리를 잇는 가교인가, 논지를 강화하는 근거인가, 아니면 정서적 울림을 주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문장은 남길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의도가 100% 전달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 자신은, 각 문장이 왜 그 자리에 존재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다듬다 보면 공들여 쓴 비유나 단어에 애착이 생겨 놓기 힘든 순간도 옵니다. 저 역시 통번역을 전공하며 자주 겪었던 고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흐름을 끊는다면, 대의를 위해 버리는 것이 AI 시대의 내러티브 편집자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입니다.

    결국 끝까지 읽히는 글을 만드는 것은 문장을 추가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함으로써 글의 밀도를 끌어올리는 식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