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인 카투니스트 Aczel의 작품입니다. 1930년 우루과이 대회부터 2026년까지 역대 월드컵의 위대한 순간들을 생생한 일러스트와 깨알 같은 정보로 풀어낸 책이에요.
이런 책은 번역의 상당 부분이 검색 전쟁입니다. “Das Wunder von Bern(베른의 기적)”처럼 이미 고유명사화된 역사적 명장면은 한국어로 굳어진 표현이 무조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축구 팬들에게 익숙한 용어를 쓰기 위해서 수없이 검색하고, 기존 번역·기사 등을 확인했습니다.
축구 선수 이름들도 만만치 않았어요.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발음 체계를 조금 아는 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결국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습니다.
제가 전공하지도 않은 네덜란드어 책을 두 권 번역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우연이 작용했습니다.
첫 네덜란드어 역서
사실 소수 언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탓에, 독일어 전공자로서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회피했던 언어 목록에 네덜란드어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신생어이자 네덜란드어의 크레올에 속하는 소수 중의 소수 언어 아프리칸스어를 할 줄 알았던 것이 번역의 매개가 됐습니다. (물론 독일어 전공을 했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긴 하지만요.)
까다로운 언어 취향을 가진 제가 매력을 느낀 아프리칸스어는 오해도 많이 받는 언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프리칸스어의 역사를 훑어보며 몇 가지 오해를 풀고, 흥미로운 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눈 돌아갔던 남아공 중고서점
기원과 특징
아프리칸스어는 17세기 네덜란드어에서 출발한 언어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항해술을 익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만들던 시기, 아프리카 최남단에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법이 상당히 단순화되고 형태가 크게 변형됐습니다. 동사 변화가 거의 사라지고, 성(性) 구분이 없어지는 등 구조적으로 훨씬 가벼워졌죠. 이 과정을 크레올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안 그래도 복잡도 순으로 독일어 >>>> 네덜란드어였는데, 이제 그보다 한층 쉬운 아프리칸스어가 된 셈입니다.
노예로 유입된 말레이·인도네시아 계열 언어, 그리고 현지 코이산어 등과 섞이면서 유럽 본토 네덜란드어와는 꽤 다른 특징도 생겼어요. 예를 들어 ‘바나나’는 대부분 언어에서 banana(🇬🇧), Banane(🇩🇪), banane(🇫🇷), banaan(🇳🇱), banana(🇮🇹), plátano(🇪🇸) 식으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프리칸스어로는 piesang입니다. 말레이어 pisang에서 왔어요. ‘satay’도 sosatie 같은 형태로 쓰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존 네덜란드어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언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려 해요. 점차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유럽인들, 즉 아프리카너(Afrikaner,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과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들은 유럽 본토로부터 점점 외면당했습니다. 당시엔 지금 같이 비행기도 없었고, 네덜란드 본국은 이미 쇠락한 상태라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형편이 아니었어요.
조상이 유럽인이고 피부색이 백인이지만, 남아프리카 땅에 정착한 이들의 정체성은 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 살던 네이티브 아프리카인들을 쫓아낸 거 아니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생각보다 아프리카 종족들끼리도 치열하게 싸워 왔습니다. 다양한 그룹들이 이주해 온 역사라서 피부색 하나만으로 ‘주인’을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운동장에 몸만 던져놓는다고 근육이 생기지 않듯, 책상 앞에 앉아만 있다고 언어가 늘지는 않는다.
스쿼트를 할 때도 힙 힌지(Hip hinge)를 제대로 잡지 않고, 타겟 근육에 자극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저 ‘숫자 채우기’식으로 몸만 움직이다 오면 몇 달을 해도 근육은 늘지 않는다. 무릎만 상할 뿐이다.
영어 공부, 혹은 외국어 공부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공부하는 ‘기분’만 내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세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1. 공부하는 ‘기분’이라는 함정
일주일에 몇 번 영어 스터디에 나가거나 학원에 등록하는 것은 훌륭한 ‘시작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단지 시작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몸만 덜렁 와서는 절대 실력이 늘지 않는다. 지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모르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기
새로 알게 된 것을 기록하기
집요하게 복습하기
이 과정이 빠진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
최근 유행하는 듀오링고 같은 앱의 맹점도 여기 있다. 게임화(Gamification) 전략은 훌륭하지만, 어느 순간 ‘연속 학습 일수’를 지키기 위해 뇌를 뺀 채 손가락만 움직이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남는 것 없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전형적인 코스다.
2. ‘집요한 호기심’의 부재
나는 외국어로 된 콘텐츠를 볼 때 병적으로 메모한다. 최근 즐겨보는 남아공 시리즈 Die Kantoor(The Office의 남아공 버전)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나는 스티브 카렐의 열혈 팬이지만, 단언컨대 남아공 버전이 10배는 더 재밌다.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소수 언어권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고퀄리티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당장 블로그에 이 글을 쓰면서 기억나는 표현들은 아래와 같다.
Kruip jy weg? (Are you hiding? 너 숨어 있니?)
Bel my rêrig! (Call me really! 진짜 전화해!)
Kom haal my! (Come fetch me! 날 데려가세요!)
현재는 일주일에 에피소드가 하나씩 나오는데, 조만간 주말을 비워 ‘Kantoor 마라톤’을 할 예정이다.
어쨌든 나는 모르는 단어나 좋은 표현을 보면 메모해 놓고, 기억하기 위해 계속 찾아보고, 입에 붙을 때까지 혼잣말을 반복한다. 뉴욕 타임즈를 읽든, 프랑스어나 독일어 영상을 보든 주옥같은 표현은 수십 개씩 쏟아진다. 한창 공부할 때는 그 표현들을 받아 적고 복습하는 데 하루의 대부분을 썼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모르는 표현이 나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가거나,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 부끄러워서 덮어버린다.
공부할 동기에 불을 지피는 연료는 호기심이어야 한다. 호기심이 없으면 집요함도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일찌감치 극복하는 것이 좋다.
3. ‘기본’을 무시하는 태도
주어와 동사 수 일치도 맞지 않는 엉망진창인 문장 구조에, 어디서 본 고급 어휘를 섞어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건 상대방에게 인지 부조화를 일으켜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할 뿐이다.
사람들은 쉬운 문법을 우습게 본다. ‘내가 다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독해는 누구나 하겠지만, 직접 말을 뱉을 때 문장이 망가지는 이유는 그 문법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 동사 100개 정도를 인칭대명사 별로 올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기본 전치사와 형용사의 정확한 쓰임새와 발음을 숙지했는가?
기본 문법 오류를 스스로 찾고 검열할 수 있는가?
이 단계를 넘어서야 어려운 단계로 갈 자격이 생긴다.
영어는 동사 변화가 양반이다. 다른 언어에서 동사는 고통의 근원이며 정체성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겨우 영어의 동사 변화 정도에서 귀찮음을 느낀다면, 다른 언어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마치며
스쿼트의 핵심이 근육의 자극을 느끼는 것이듯, 공부의 핵심은 뇌의 자극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공부는 ‘뇌를 뺀 행위’였는가, 아니면 ‘집요한 추적’이었는가?
만약 후자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듀오링고를 끄고 기본 동사 변화표부터 다시 펼치길 권한다.
현대 사회에서 글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야 토큰을 쏟아내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지만, 오늘날의 글쓰기는 독자의 집중력이라는 희소 자원을 두고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라디오 드라마가 성행하던 시절, 사람들은 소리만으로도 등장인물의 미묘한 심리와 희로애락에 깊이 몰입했습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요. HD 화면 속에서 화려한 CG와 천재지변이 펼쳐져도, 현대인은 쉽게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자극의 역치는 높아졌고, 인지 자원은 희귀해졌습니다. 독자는 자신에게 효용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집요하게 붙잡는 편집자적 기준은 바로 ‘글의 밀도’입니다.헐렁한 문장들이 모여 있는 글은 밀도가 낮습니다. 시간을 들여 읽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글의 밀도를 높이는 과정을 종종 ‘스티브 잡스의 엘리베이터 해고’에 비유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직원에게 업무 내용과 기여도를 묻고, 답변이 설득력이 없으면 바로 해고했다는 일화처럼 말이죠.
제가 글을 편집할 때 사용하는 판단 방식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첫째, 모든 단어는 문장 안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조사나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수식어부터 과감히 덜어냅니다.
둘째, 모든 문장도 글 전체에서의 존재 가치를 치열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이 문장은 정보를 전달하는가, 논리를 잇는 가교인가, 논지를 강화하는 근거인가, 아니면 정서적 울림을 주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문장은 남길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의도가 100% 전달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 자신은, 각 문장이 왜 그 자리에 존재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다듬다 보면 공들여 쓴 비유나 단어에 애착이 생겨 놓기 힘든 순간도 옵니다. 저 역시 통번역을 전공하며 자주 겪었던 고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흐름을 끊는다면, 대의를 위해 버리는 것이 AI 시대의 내러티브 편집자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입니다.
결국 끝까지 읽히는 글을 만드는 것은 문장을 추가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함으로써 글의 밀도를 끌어올리는 식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