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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 여행기 2: 이민하고 싶은 이유

    태국 여행기 2: 이민하고 싶은 이유

    태국은 인구의 90%가 불교를 믿는 나라이며, 도시 곳곳에 불상을 볼 수 있고, 그 앞에 꽃, 향, 붉은 음료수를 공양하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사당 앞에 높인 붉은 환타,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불교 경전이나 설화에서 자주 들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전생에 부처님이나 사리탑에 꽃을 정성껏 올리거나, 남이 올린 꽃의 먼지를 털어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위덕을 갖춘 아름다운 외모’를 얻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태국인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단순한 유전적 우연이 아니라 오랜 공덕의 축적일까. 실제로 태국 사회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전생에 쌓은 ‘탐분(Tham Bun, 공덕)’의 결과물로 여겨지기에, 치장은 단순한 허영을 넘어 자신의 업을 돌보는 긍정적인 행위로 존중받기도 한다.

    태국 여행기 2: 이민하고 싶은 이유
    Photo by Norbert Braun / Unsplash

    반면,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미는 청순, 순수, 절제에 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몸, 여리여리한 실루엣이 미의 표준이며 종종 그에 벗어나는 여성에게는 ‘섹시’, ‘건강미’라는 레이블이 별도로 붙는다. 몸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패션을 선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기준과 명백히 어긋났다. 한국적 미의 질서가 허용하는 이른바 ‘건강미’라는 수사조차 선에서조차 나의 추구미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소년기부터 주변인들의 검열에 노출되며, 스스로를 계속 축소시켜야 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옷장을 타협시켜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 여성들과 느낀 동질감이 얼마나 큰 해방구였을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내가 소속될 곳을 찾았구나’는 감격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곳의 여성들은 XS부터 XL에 이르기까지, 신체 스펙트럼 상 모양과 크기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실루엣을 과감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다양한 체형들을 볼 수 있었는데,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하이패션 체형, 작고 마른 요정 체형, 심미적인 근육 데피니션이 드러나는 체형, 풍만한 곡선형 등 다양성 그 자체였다. 이들은 각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각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심미적 상태를 구현하는 수행 주체였다. 

    일원화된 미적 규범에 억눌려 있던 나의 감각이 비로소 확장되는, 형언하기 어려운 인류학적 동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물론 밤 거리의 쥐와 바퀴벌레와의 조우가 이 고양된 감격을 어느 정도 조정시켰지만 말이다.)

    한국 중장년 여성의 경우, 스스로 ‘여자로서의 정체성’과의 단절을 겸허히 수용하고 ‘무성적(Asexual) 존재’로 규정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아줌마 파마 머리’는 그 결의의 표현이자 통과 의례이다. 반면 태국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과감한 컷의 드레스와 굽 높은 구두를 통해 여전히 매력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해방적인 광경 앞에서, 나는 비로소 이곳을 내 삶의 터전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남자들 조차 아름다웠다. 태국의 상좌부 불교는 성별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전생의 업에 따라 잠시 머무는 상태로 보기에, 제3의 성(Kathoey)에 대해서도 유독 관용적인 문화를 지닌다. 소년의 마른 근육질 몸에 정교한 의술과 탐미적 집착이 결합된 이들의 신체는, 때로 생물학적 여성성을 압도하는 고혹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젠더 퍼포먼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방콕 길거리는 강남의 의료 자본주의를 연상케 하는 피부과와 성형외과로 빼곡하며, 친숙한 시술의 이름들이 메뉴판에 적혀있었다. 편의점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소비 공간조차 한국과는 그 위계가 다르다. 화장품과 스킨케어 섹션은 단순한 구색 맞추기를 넘어 생활 필수재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파운데이션과 콜라겐, 각종 미백 성분들이 일용품의 형태로 유통되는 이 현상은, 태국인들에게 ‘미(美)’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하고 갱신해야 할 보편적 권리이자, 현생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자기 수행적 공덕’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 남아공 필수 기념품

    남아공 필수 기념품

    남아공에 가게 된다면, 아니면 영연방(Commonwealth) 국가를 방문했을 때 남아공 수입품을 발견한다면, 꼭 시도해보면 좋은 품목을 정리했다.

    빌통

    빌통(Biltong)은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반드시 시도해봐야 하는 식품이다. 

    빌통은 육포가 아니다. 말린 스테이크다. 남아공 사람 앞에서 빌통을 육포(Jerky)에 비교하는 것은 문화적인 실례에 준하는 것이고, 상대에 따라 기분이 크게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아공 사람은 이미 수많은 도발을 겪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당신의 무지를 정정해줄 것이다.

    빌통은 생고기에 절대 열을 가하지 않고 찬 바람으로 건조하여 제조한다. 그리고 설탕이나 양념을 사용하지 않고 식초, 설탕, 후추로 큐어링하기 때문에 단순 육포에 비해 더 건강하고, 우월한 음식이라고 여겨진다. 

    ‘육포류’라서 안타깝게도 한국 국내 반입이 금지되는데, 심지어는 수입도 안 된다.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허용한 육포 수입 국가 목록에 남아공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접 만드는 과정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는 빌통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많이 없다. 그래서 몇 안 되는 국내 빌통 판매자들도 자체 제조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짓수도 제한적이다.

    언젠가 영연방 중 한 곳의 빌통이 국내에 들어온다면(왠지 남아공이 수입 허가를 받는 것 보다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단순 와인 안주 취급을 할 것이 아니라 마트 정육 코너 옆에 작은 판매대를 하나 내어주는 것이 존중을 표하는 마땅한 방법이다. 실제 남아공 마트에서는 정육점내 큰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빌통 건조 시설. 출처: Biltong Depot

    빌통의 국내 생산이 더 어려운 이유는, 한국의 기후가 빌통 제조에 이상적인 조건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필요한 빌통에게 일년 중 습한 날이 꽤 많은 한국은 결코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콰줄루나탈(KwaZulu-Natal)지역만 가봐서 그런지, 남아공이 훨씬 습하고 끈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여튼, 그렇다고 한다.

    기후 뿐만이 아니다. 대량 생산할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국내 빌통 생산자들이 이러한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빌통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감수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너무 크다. 대한민국 국민의 견문을 넓히고, 국내 거주 남아공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드루어보르스

    로날드와 친구였던 시절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곤 했었는데, 언젠가 ‘이게 뭔지 맞춰보라’며 사진을 하나 보내온 적이 있다. 사진 속에는 나뭇가지로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아프리카 부족들이 구강위생 도구로 사용하는 막대기인 치목(齒木)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이 바로 드루어보르스(Droëwors)였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당시 나에게 보내온 사진.

    드루어보르스는 말린 소세지라는 뜻이다. 쉽게 건조되도록 얇게 잘랐다고 한다. 빌통을 취급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드루어보르스도 판매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개껌 같이 생겼지만, 실제로는 소금 함량이 좀 높은 편이라 반려견 급여로는 적합하지 않다.

    맛은 짭짤한 말린 고기. 건조 정도에 따라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도 있고, 문방구에 팔던 ‘숏다리’같이 건조하고 딱딱한 것도 있다. 촉촉할 수록 더 맛있다.

    남아공 사람들의 건강 상식에는 ‘촉촉한 드루어보르스는 지방 함량이 높고, 건조한 것이 건강에 낫다’라는 내용이 있다. 무엇이 더 맛있을 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결론

    모든 나라에는 자국만의 육포가 있다. 싱가포르의 비첸향(Bee Cheng Hiang), 달달하고 덜 자극적인 한국식 육포, 이탈리아의 살라미(Salami), 독일의 되르플라이쉬(Dörrfleisch), 그리고 남아공의 빌통. 나는 사실 육포를 자주 먹지 않기 때문에 어느 나라 말린 고기든 전부 거기서 거기지만, 빌통의 우월성에 대한 남아공인들의 자부심을 이해한다면 라포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선제적으로 존중을 표할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참고로 편의상 드루어보르스를 빌통의 하위 개념으로 배치했지만, 실제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러스크

    많은 사람들이 ‘러스크’라고 하면 튀겨서 설탕을 입힌 식빵 조각을 떠올릴 것이다. 아프리칸스어 이름은 Beskuit인데, 17세기에 네덜란드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오랜 항해를 견딜 수 있도록 두 번 구워 딱딱하게 만든 빵 Beschuit가 아프리카 기후에 맞게 현지화된 것이다.

    버터밀크(Karringmelk)를 넣는다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버터밀크는 버터 생산의 부산물로, 이름과는 달리 저지방이며 영양적 가치도 높다. 남아공 마트에서는 항상 유제품 칸에서 볼 수 있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그냥 먹으면 턱이 나갈 수 있지만, 일부러 딱딱하게 먹는 사람들도 있다(내 이야기다). 공식 레시피가 존재하는 라면을 생으로 부숴서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어쨌든 커피에 적셔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구글 검색 결과

    작년 남아공 방문 당시 나는 아직 과잉 절제를 하던 중이었어서, 딱 봐도 설탕과 밀가루가 압축되어 칼로리 밀도도 높고 중독성도 강해보이는 러스크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참고로 나는 수년간 디저트라는 개념을 외면하며 살았고, 한때는 그 억압된 식욕이 컬리플라워와 브로콜리 과식으로 귀결되었을 정도로 보상 체계가 왜곡된 상태였다.

    참고로 러스크는 디저트가 아니라 아침 식사지만, 나는 단맛이 나는 탄수화물은 무조건 디저트 취급을 한다.

    디저트는 여성의 3대 본능 중 하나로, 아무리 외면하고 길들이더라도 수천년간 깊숙이 뿌리 내린 강력한 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슈퍼마켓에서 무설탕 & 무밀가루 버전을 봤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근위대가 손 흔드는 어린이들을 무시하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듯, 나 또한 러스크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을 힘겹게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건강한’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러스크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디저트 욕구를 해소시킬 수 있음을 의미했다. 건강 디저트는 오랫동안 ‘진짜 디저트’의 망령 취급을 받아 왔지만, 최근에는 퀄리티가 좋아져서 섭취했을 때 만족감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편이다. (물론 스테비아 등 감미료는 화학적 작용에 있어서 설탕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설탕을 오래 안 먹다보면 맛을 까먹기 때문에 대체 가능하다.)

    건조한 편인 시리얼 위트빅스(Weet-bix)를 기준으로 보자면 러스크는 더 촉촉하지만, 커피에 적셔서 먹는 목적으로 생산되었으므로 밀도가 높고 두께 자체가 묵직해서 씹는 데 상당한 노동이 요구된다. 굳이 적셔서 먹지 않더라도 커피와 잘 어울린다.

    내가 고른 버전은 밀가루 대신 아마씨, 코코넛 등으로 만들어 섬유소도 훨씬 많고, 영양적으로도 더 밀도 높다. 요새는 키토제닉(Ketogenic) 식품의 품질이 너무 좋아서 밀가루의 수요탄력성이 많이 높아졌을 거라 예상이 된다. 한국에서도 점점 구하기 쉬워지고 있지만, 아직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내가 해외 생활을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키토제닉 및 대체 식단 식품에 대한 접근성이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남아공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졌나보다

    혈당 관리를 하시지만 ‘건강 음식’에 의심이 있으신 로날드 아버지께도 드렸는데, 먹을만 하다고 놀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러스크를 현지에 있는 동안 세 번 정도 사 먹었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사왔는가? 아니다. 회사에 기념품으로 가져갈 것을 제외하고, 개인 소비용으로는 사오지 않았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회사에 가져간 것

    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을 것이 분명한데, 한국에서는 와인을 제외하면 남아공 수입품은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회성 소비에는 관심이 없다.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예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난도스 소스

    난도스(Nando’s)는 포르투갈인들이 남아공에 넘어와 만든 치킨 브랜드로, 영연방 국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닭을 튀기지 않아 패스트푸드 중에서는 나름 건강식으로 간주된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난도스는 식사 메뉴로도 유명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바로 시그니처 소스. 한국에 사오면 좋은 것이 바로 이 소스다. 페리페리 칠리로 만들었으며, 설탕이 첨가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현지가 더 저렴하기 때문에 기념품으로서의 정당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매운맛도 별로 안 맵다.

    우리도 작년에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한 병을 사왔는데, 나는 사실 1년이 넘도록 무슨 맛인지 알지 못했다. 사온 직후 닭가슴살과 같이 먹어보려 했지만, 로날드가 굉장히 소중하게 아껴 쓰는 것을 알고는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닭가슴살은 야채 취급을 받는 남아공 출신이다보니, 로날드는 내심 소스를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로날드는 너무 착하기 때문에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선제적으로 안 건드렸다)

    최근들어 처음으로 난도 소스를 제대로 맛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연방 중 한 곳인 싱가포르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부기스(Bugis)의 몰에 자리한 난도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소스가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는데, 신맛을 좋아하고 타바스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난도 소스가 정말 잘 맞을 것이다. 우리도 출국 전에 소스 세 병을 샀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로날드에게 전부 양보할 것 같다.

    아마룰라

    코끼리 열매라고 불리는 마룰라(Marula)와 크림, 설탕으로 만든 남아공 리큐르. 이 제품은 국내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설탕이 잔뜩 들어가다 보니 입에 착착 감기는 화사한 성인용 아이스크림에 가깝다.

    작년 남아공 방문 당시에도 나는 설탕을 피하는 중이었지만, 외국을 방문한 손님이 된 입장에서 호스트가 권하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 아래 사진이 찍힌 날, 아마룰라는 많이 마셨다.

    남아공 필수 기념품

    알코올이 함유된 굉장히 달콤하고, 짙은 농도 아이스크림을 녹여서 마시는 맛이다. 그런데 실제 아이스크림과도 잘 어울린다. 깔루아 밀크 같이 칵테일을 만들기에도 좋다.

    나는 참고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일년에 5회 이하로 마신다. 하지만 아마룰라는 그 5회 중 2회 정도는 내어줄 수 있는 특별한 술이다.

    다음 번 남아공을 두 번째로 방문한다면, 더 새로운 것을 많이 경험하면서 이 목록을 더 확장할 계획이다.

  • 남아공 때문에 심난한 이야기

    남아공 때문에 심난한 이야기

    나는 남아공을 좋아한다. 아프리카너(Afrikaner) 특유의 투박한 억양과, 불과 백 년 만에 아프리칸스어를 학문적 수준으로 격상시킨 그 광기 어린 의지력에 경외감을 느낀다. 육식에 진심인 성향과 은근히 보수적인 면모도 내 취향에 닿아 있다.

    한편으론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흑인 여성들의 지적 잠재력과 회복탄력성에서 이 나라의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먹방을 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남아공 흑인 여성의 먹방이다. 그녀의 성공이 다른 여학생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개별 존재의 반짝임과는 별개로, 이 국가의 시스템은 형용할 수 없는 괴사 상태에 놓여 있다. 내가 목격한 남아공은 인적 자원의 풍요와 구조적 파멸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강제된 평등: B-BBEE와 고용 쿼터제의 역설

    남아공에는 B-BBEE(Broad-Based Black Economic Empowerment)라 불리는 흑인 경제 육성법이 존재한다. 단순히 권장하는 수준이 아니다. 기업의 소유권, 경영진 구성, 심지어 공급망까지 흑인 비율에 따라 ‘점수(Scorecard)’를 매긴다. 점수가 낮으면 정부 사업 입찰은 물론, 민간 기업 간의 거래에서도 후순위로 밀려난다.

    2024년부터 강화된 고용 평등법(EEA)은 숙련직군에서 흑인 비율을 최대 90%까지 요구하며, 위반 시 매출의 10%를 벌금으로 부과한다. 의도는 선했으나 결과는 냉혹하다. 숙련된 기술자나 경영진이 인종 쿼터에 밀려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를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이 채우면서 국가 기간망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노답 사례 1: 힐브로우

    70-8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중심이었던 힐브로우(Hillbrow)는 이제 범죄와 오물의 상징이 되었다.

    아파르트하이트가 끝나고 부유한 사람들은 샌튼(Sandton)으로 넘어갔고, 힐브로우는 점점 황폐화되었다.

    갱단이 점거한 고층 빌딩에는 상하수도가 끊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변기를 사용한다. 지하실에 수백 명분의 인분이 쌓여가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말티즈 한 마리가 사용하는 배변 패드도 악취가 생기는데, 수백명 사람들에게서 나온 오물이 지하실 전체를 덮고 있는 사실은 말문이 막힌다.

    힐브로우 전과 후

    화려했던 근대 건축의 껍데기 속에서 도시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개노답 사례 2: 전기 국영화

    남아공에 있다보면 종종 전기가 끊기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Load Shedding이다. 그래서 태양열 발전기가 있는 집이 많다.

    이 전력난은 단순한 에너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효율적이었던 전력사 에스콤(Eskom)이 국영화 이후 부실 경영, 부정부패의 온상이되어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된 결과이다.

    이를 개혁하려던 전 CEO 안드레 드 루이터(André de Ruyter)는 커피에 청산가리 투척을 당해 결국 사임하고 잠깐 나라를 떠나야 했다.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지식인은 목숨을 걸고 개인 경호원에 의지하거나 망명을 택해야 하는 것이 남아공의 문법이다.

    실제 현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Snitches get stitches, and end up in ditches.” (밀고자는 꿰맬 상처를 입고, 결국 도랑에 처박힌다.)

    개노답 사례 3: 택시 조폭

    남아공의 택시 산업은 태생부터 비극적이다. 70~80년대 아파르트하이트 시절, 인종차별 정권은 흑인들을 일터에서 먼 변두리로 몰아넣고도 어떠한 이동 수단도 제공하지 않았다. 국가가 외면한 이 거대한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민간 미니버스 택시였다.

    초기엔 불법이었으나 생존을 위해 자생했던 이 산업은 1987년 규제 완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버스와 기차를 불태우고, 전문 킬러(Izinkabi)를 고용해 정적을 제거한다. 택시에서 총을 쏘고 유유히 사라지는 청부 살인 장면은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택시 기사들과 우버 기사들 간의 폭력 사태

    과거 흑인 인권을 위한 유일한 발이었던 조직이, 이제는 대낮에 정적을 제거하고 국가 인프라를 불태우는 ‘그림자 국가’가 된 것이다.

    개노답 4: 경호 업체도 연루된 농장 서리

    남아공 길거리에서 타조알 만한 아보카도 5개를 3천 원에 샀을 때, 나는 그것이 아프리카 대지의 축복인 줄로만 알았다. 순진한 오판이었다.

    수확까지 8년이 걸리는 아보카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가거나, 농장 보안 업체와 결탁해 조직적으로 훔친 장물이었다. 무지한 소비자가 누린 저렴한 가격의 배후에는 생산자의 절망이 깔려 있었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축복받은 남아공의 아보카도’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마트에서 사면 한국과 크게 다른 가격은 아니다.

    결론

    개개인을 보면 여전히 이 나라의 미래를 믿고 싶어진다. 어떻게 해야 이 비극이 멈출 수 있을지 혼자 머리를 싸매며 고민에 잠기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처럼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지으면 해결될까? 하지만 문제는 파편화된 시설이 아니라 붕괴된 공교육 시스템 그 자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백을 메운 사교육 시장은 기형적일 만큼 비대해졌다.)

    개인이 시스템 차원의 개혁을 시도하기엔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 부패를 척결하려 하면 지나가던 택시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거나, 아침 커피에 든 청산가리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정의감은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

    위와 같은 사례를 접할 때마다 짙은 무력감이 든다. 개노답 사례는 언급한 것 외에도 더 많다.

    시스템이 머리부터 부패한 이 곳에서, 축복 받은 자연과 자원이 구조적 어둠에 먹혀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몹시 괴롭다.